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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_ 이탈로 칼비노

by lucy831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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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Barone Rampante

 

작품 해설

소설의 주인공 코지모 디 론도는 열두 살이 되던 1767년 6월 15일 나무로 올라가 일생을 그 위에서 살기로 결정합니다. 코지모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계기는 누나가 만든 달팽이 요리였습니다. 자신이 원치 않는 달팽이 요리를 먹으라고 계속 강요하는 아버지에 반발해 나무 위로 올라갔지만, 사실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코지모는 이미 권위적이고 시대에 뒤처진 아버지로 상징되는 귀족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격변하는 사회의 분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작이 되기만을 갈망하는 그의 아버지는, 매일 궁정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생활하고, 살아있는 자식들보다는 죽은 조상의 석고상을 더 끔찍이 위하는 인물입니다. 전쟁에만 관심이 있는 어머니, 수녀인데도 집에 눌러살면서 괴상한 요리를 즐겨 만드는 누나, 사람을 피하며 자신만의 연구에 빠져 있는 삼촌. 코지모의 반항에는 이런 인물들에 대한 깊은 혐오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혐오스러운 인물들이 살고 있는 지상을 피해 나무로 올라간 코지모는 현실을 회피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아간 인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지모는 결코 지상에서의 삶을 회피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땅 위를 걷는 것은 포기했지만, 그럼으로써 그는 오히려 인간들을 괴롭히는 문제를 좀 더 높은 곳에서 '거리를 가지고' 바라볼 수 있어, 명확한 비전을 얻고 그에 따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땅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라고 코지모는 말합니다. 코지모는 나무 위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땅 위의 삶에 깊이 관여합니다. 자신의 영지의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기발한 고안을 해내기도 하고, 끊임없는 독서와 연구를 통해 지식의 영역을 확대시켜 나갑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반항으로 일관하던 아버지와의 관계도 회복되고 삼촌과도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또 코지모 덕분에 누나 역시 결혼을 하게 됩니다. 자연이라는 새로운 질서에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맞서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이 필요함을 깨달은 코지모는 나무 위에서 다방면의 공부에 몰두하고, 그 당시의 철학자, 과학자들과 서신 교류를 하면서 전 유럽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됩니다. 또한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그 지방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귀족과 공화국의 폭정에 대항하게 합니다. 코지모는 이렇게 시대의 움직임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기술 개발이나 지역 사회 행정에 참여하기도 하고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기도 합니다. 계몽주의적인 이성을 높이 평가하는 코지모는 사랑에 있어서도 항상 감정보다는 이성을 우위에 둡니다. 이 때문에 바로크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충동을 지닌 첫사랑 비올라와는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코지모는 숨을 거두기 직전 하늘에 뜬 기구를 타고 동생과 옴브로사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초인간적인 고집으로 독특하고 고독하게 나무 위에서 살아갑니다. 이처럼 나무 위에 올라가 세상과 거리를 둔 채 현실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또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 남작은 바로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의 위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현실을 외면한 채 독서에 빠져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산적 잔 데이 브루기 역시 시사하는 바가 많은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코지모는 고집스럽고도 가혹한 의지로 복종하고 자신의 완벽성을 실현시켜 나감으로써 인간이 일반적인 사회의 규범과 관습을 거부하면서 자신만의 개성으로 이에 대항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

나는 가끔씩 글쓰기를 멈추고 창가로 간다. 하늘은 텅 비어 있다. 초록의 지붕 밑에서 사는 데 익숙한 우리 옴브로사의 노인들은 그런 하늘을 보면 눈이 아프다. 우리 형이 사라진 후에, 또는 인간들이 미쳐 도끼를 들고 날뛰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무가 견뎌날 수 없게 되었다고들 한다. 그리고 나무들도 바뀌었다. 이제 감탕나무나 느릅나무, 떡갈나무는 찾아볼 수 없다.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메리카, 인도의 식물이 여기까지 가지와 뿌리를 뻗쳤다. 옛날 식물들은 위쪽으로 물러났다. 언덕 위에는 올리브나무가, 산속의 숲에는 소나무와 밤나무가 있었다. 그 아래 해안에 위치한 어마어마하게 크고 한적한 정원에서 키우는 붉은 유칼리나무와 거대한 고무나무 때문에 우리 고장이 오스트레일리아로 변한 것 같았다. 그 나머지는 이파리가 빈약한 사막의 황량한 나무인 야자수였다. 옴브로사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텅 빈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옴브로사가 정말로 존재했는지 자문해 본다. 이리저리 갈라진 나뭇가지, 잎맥이 섬세하고 끝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나뭇잎들은 불규칙적으로 조각조각 섬광처럼 보일 뿐인 하늘 위에 펼쳐졌는데, 이는 아마도 우리 형이 물까치같이 가벼운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하늘은 마치 내가 페이지마다 잉크로 남긴 글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 위에 수 놓인 것 같았다. 그 글은 삭제, 수정, 신경질적으로 갈겨쓴 글, 낙서, 공백으로 가득 차서 어떤 때는 굵고 깨끗한 씨들이 쏟아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작은 씨앗같이 미세한 표시들로 빽빽해지기도 했다. 어떤 때는 스스로 비틀어지기도 하고 나무나 구름으로 장식된 꽃봉오리 같은 문장과 연결되었다가 장애물을 만나 다시 비틀어지기도 하고, 또 달리고 달려 다시 풀려나가다가 마지막으로 의미 없는 말과 생각, 꿈의 실타래에 뒤얽힌 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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