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
홀로.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 사이
여자는 오늘도 지하철역에서 그 남자를 보았다. 연인이었던 남자. 둘이 함께이던 시절에 남자와 여자는 늘 함께 출근을 했었다. 같은 동네에 살았다. 처음 만나던 무렵 여자는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가까이 살면 좋겠다 했던 것은 남자였다. 남자는 이상하게도 자신에겐 거리가 중요하다 했다. 부르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안심이 되고 그래야 진짜 내 사람이라는 실감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남자는 적도 가까운 나라로 출장을 떠났다. 서울은 겨울이었다. 코끝이 빨개진 채로 거리를 걷고 있는데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는 불쑥 "여기 정말 덥다"고 말했다. 순간 대단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가 아주 멀리 있구나, 느끼는 순간 여자는 불안해졌고 불편했다. 다음 날, 여자는 남자의 집 근처에 새 집을 얻었다. 그가 맞았다. 가까이 있으니 안심이 되었다. 여자는 야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남자의 창가를 올려다보는 것이 좋았다. 불이 켜진 것을 보면 '안 자고 뭐 해' 하고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잠시 후엔 언제나 남자의 창문이 열렸다. 내다보며 손을 흔들어주거나 뛰어나와서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주곤 했다. 남자와 헤어진 후에도 여자는 한참이나 그 집 앞을 매일 지났다. 이상했다. 창가의 노란 불빛은 여전한데 전처럼 다정하지 않았다. 잔인했다. 남자가 저기 있는데, 거기 있다는 것을 아는데 부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다. 멀리 있으면 불안하던 사람이었는데 가까이 있으니 아프게 찌르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안다. 가깝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아픈 광경을 보았다. 권태기가 온 것인가 걱정은 했지만 아직은 둘이 함께라고 믿고 있던 시절이었다. 남자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서 있는 낯선 여인을 보았다. 갑자기 연락을 받은 듯 남자는 놀란 얼굴로 뛰어나왔지만 금세 웃었다. 얼굴이 환했다. 여자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밝은 미소였다. 마음이 내려앉았고 이별을 예감했다. (중략) 오늘도 여자는 지하철역에서 남자를 보았다. 이름은 알지만 부를 수 없었다. 언제나 손잡고 걷던 사람이 몇 걸음 앞에 있는데 더는 다가가서 만질 수 없게 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사랑이 끝났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가까이 있지만 아주 멀리 있고 거기 있지만 거기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시 함께. 한 번 더, 너의 손을 잡고 걷는 길
이별의 과정에서 여자에게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우리의 인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여자는 "벗어날 수 없다고 느껴"라고 말했다. 남자는 그 말 뒤에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갑갑함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답에 남자는 한숨이 났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고 만 것일까. 언제고 그 안에 머물고 싶던 사랑이었는데. 아주 많은 일들이 한순간에 일어났다. 작은 오해에서 불신이 생겼고 일단 한 번 깨진 믿음은 더 큰 오해를 낳았다. 해명은 변명으로 취급되었고 노력은 나쁜 결과만을 초래했다. 억울해서 화를 내니 더 멀어질 뿐이었다. 모든 것이 쓰나미처럼 일순간에 밀려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깨지고 망가져 할 수 있는 일이란 놓는 것뿐이었다. 미안하다 말했다. 너를 더는 아프게 할 수 없어서 끝을 선택하겠다고 말하자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관계는 그렇다고 치자. 사랑까지도 모두 끝인가.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실은 미련이 남았다. 미련의 그림자는 길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맴돌았다. 지구와 달처럼, 태양과 지구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궤도 안에 있었다. 자주 마주쳤다. 가능성이 보이는 듯한 순간도 있었으나 너무 나빴던 마지막의 기억이 두 사람의 발을 묶었다. 긴 시간을 맴돌다가 결단을 내린 것은 여자 쪽이었다. 다른 남자를 만날 거라고 통보하듯 말했다. 남자는 여자가 마지막 남은 끈을 끊고 싶은 거라 여겼다. 오늘 남자는 우연히 여자와 마주쳤으나 스쳐 지나갔다. 짧은 인사마저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남자를 불렀다. 그러나 멈춰 서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자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다고 느낀다.' (중략) "벗어날 수 없다고 느낀다고. 내 말뜻을 모르는 거야, 모르고 싶은 거야?" 그제야 남자는 여자의 눈을 보았다.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짐작과는 다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애를 써봐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이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멈춰 선 채 그대로 있었다. 더는 멀어지지 않았다. 여자의 진짜 마음, 여자가 하려는 진짜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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